음악을 좋아하지만 뭘 들어야 할지 모를 때 듣는 순서
명반 목록 완주가 실패하는 이유와, 좋아하는 곡 하나에서 취향을 넓혀가는 구체적인 순서를 정리했습니다.
요약: 뭘 들어야 할지 모를 때 어떤 순서로 들으면 되나
- 명반 목록을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듣는 방식은 대부분 중간에 멈춥니다. 목록은 순서대로 끝내는 과제가 아니라 필요할 때 찾아보는 용도입니다.
- 출발점은 좋아하는 곡 한 개면 충분합니다. 거기서 프로듀서, 세션 연주자, 레이블, 샘플 원곡으로 뿗어 나가면 길이 저절로 생깁니다.
- 입문 앨범은 대표작보다 듣기 쉬운 것이 먼저입니다. 40분짜리 교향곡부터 시작하면 대개 포기하게 됩니다.
- 추천 알고리즘은 취향을 넓히는 도구가 아니라 유지하는 도구입니다. 넓히려면 사람이 직접 고르는 곳을 하나 끼워 두어야 합니다.
- 새 앨범을 계속 찾는 것보다, 걸린 앨범 하나를 여러 번 듣는 쪽이 취향을 만듭니다.
음악을 좋아하는데 뭘 틀어야 할지 모르겠는 상태가 있습니다. 재생 목록은 늘 같은 곡을 돌고, 추천은 이미 아는 것만 내놓습니다. 그렇다고 명반 목록을 열면 1,001장이 있고,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순서를 정리합니다.
명반 목록을 순서대로 듣는 방식은 왜 실패하나
가장 흔한 시도이고 가장 흔한 실패입니다. 죽기 전에 들어야 할 앨범 1,001장 같은 목록을 1번부터 듣기 시작하는 방식입니다.
이걸 해본 사람들의 후기는 비슷합니다. 숙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하고, 관심도 없는 음악을 몇 시간씩 견디게 되고, 몇 년짜리 일거리가 됩니다. 그러다 멈춥니다.
목록 자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장르를 통합한 대형 목록은 만든 사람과 그 시대 시장의 편견을 반영합니다. 뻔하고, 낡았고, 특정 성별과 인종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이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렇다고 목록이 쓸모없는 건 아닙니다. 쓰는 방식이 틀린 것입니다. 목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끔느는 순서표가 아니라, 이미 뭐가에 꽂혔을 때 그 옆을 찾아보는 용도로 쓸 때 잘 작동합니다.
추천 알고리즘이 하는 일은 넓히기가 아닙니다
알고리즘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는 일이 다른 것입니다. 추천 시스템은 이탈하지 않게 붙잡아 두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려면 확실히 좋아할 것을 줘야 하고, 확실히 좋아할 것은 이미 듣던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필터월드』를 쓴 카일 차이카가 든 예가 선명합니다. 그는 스포티파이만 썼다면 존 콜트레인에 빠지지 않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곡이 너무 길어서 추천 대상에 오르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이가 알고리즘에 불리한 음악은 아무리 좋아도 만나지지 않습니다.
더 불편한 지점도 있습니다. 그가 인터뷰한 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취향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피드가 시키는 대로였던 것 같다는 말입니다.
이용자 쪽 체감도 비슷합니다. 재생 목록은 같은 다섯 곡을 순환시키고, 영상 플랫폼은 이미 검색한 곡의 변주만 밀어주고, 짧은 영상 앱은 바이럴만 노린 조각을 뿌립니다. 이 안에서는 취향이 넓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한 가지 곯들일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천 개 장르로 음악 지도를 만들어 여러 추천 기능의 바탕이 됐던 데이터 엔지니어가 회사를 떠나자 그 지도의 갱신이 멈추었습니다. 당연히 있는 줄 알았던 것도 사실은 몇 사람의 손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알고리즘에게 취향을 통째로 맡길 이유가 하나 더 줄어드는 이야기입니다.
출발점은 좋아하는 곡 하나면 충분합니다
여기부터가 실제 방법입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 시작하는 곳은 목록이 아니라 이미 좋아하는 곡 하나입니다. 그 한 곡에서 뻗어 나가는 길이 여러 개 있습니다.
- 크레딧을 읽습니다. 그 곡을 누가 프로듀싱했고 누가 연주했는지 봅니다. 그 프로듀서가 만든 다른 곡, 그 세션 연주자가 참여한 다른 앨범로 넘어갑니다. 이렇게 가면 장르를 넘나들게 돼서 알고리즘이 못 하는 일을 합니다.
- 레이블을 팍니다. 좋아하는 앨범을 낸 레이블의 다른 발매작을 봅니다. 레이블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골라 내는 곳이라 꽤 잘 맞습니다.
- 샘플과 커버의 원곡을 찾습니다. 좋아하는 힙합 트랙이 쓴 샘플의 원곡으로 올라가면 대개 1960년대에서 70년대 소울이나 재즈가 나옵니다. 이 길로 장르 하나가 통째로 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 영향받은 앨범을 거꾸로 찾아갑니다. 인터뷰에서 아티스트가 언급한 이름들을 따라갑니다.
- 오프닝 밴드를 봅니다. 공연에 일찍 도착해 앞 팀을 듣습니다. 골라주는 사람 없이 새로운 걸 만나는 몇 안 되는 자리입니다.
한 사람이 이 방식을 기록한 사례가 있습니다. 열네 살에 메탈리카로 시작해 드림 시어터를 거쳐 킹 크림슨과 핑크 플로이드로, 거기서 음악사 전체를 훑는 사이트를 만나 현대 클래식까지 갔습니다. 그가 남긴 표현이 좋습니다. 음악이라는 나무가 가지를 뻗어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 남긴 다른 문장도 새겨둘 만합니다. 누군가 그것을 사랑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나도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좋다는 평가만으로는 안 되고, 왜 좋은지 말하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평론과 라디오 디제이가 여전히 쓸모 있는 이유입니다.
입문 앨범은 대표작이 아니라 접근성으로 고릅니다
새 장르에 들어갈 때 가장 흔한 실수가 최고작부터 트는 것입니다. 그 장르의 문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정점부터 들으면 대개 아무것도 안 들립니다.
국내 클래식 입문 글에서 잘 정리된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 멜로디가 귀에 바로 들어오는 곡. 둘째, 연주 시간이 너무 길지 않은 곡. 40분짜리 교향곡부터 시작하면 중간에 포기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가 다른 장르에도 적용됩니다.
- 클래식 — 영화음악에서 시작하는 길이 가장 거부감이 적습니다. 이미 귀에 익은 소리라 그렇습니다. 다음이 미니멀리즘, 그다음이 근현대 계열입니다. 시대순으로 바로크에서 낭만까지 올라가는 방식도 좋습니다. 음악이 바뀌는 게 몸으로 느껴집니다.
- 재즈 — 『Kind of Blue』가 입문서처럼 계속 언급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화음이 천천히 바뀌어서 멜로디가 귀에 잡힙니다. 빌 에번스처럼 대표작이 어려운 경우에는 대표작 대신 더 편한 앨범을 먼저 권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 앨비언트 — 순수한 것부터 가지 말고 앨비언트 성향이 약한 것부터 듣습니다. 멜로디나 리듬이 남아 있는 앨범이 적응할 시간을 줍니다.
- 포스트록 — 시귀르 로스,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 모과이처럼 이야기가 뚜렷한 쪽이 입문으로 자주 꼽힙니다.
국내 커뮤니티에서 정리된 클래식 단계론도 참고할 만합니다. 처음에는 듣기 편하고 선율이 좋은 곡만 듣습니다. 다음 단계에서 교향곡이나 소나타를 악장 단위로 조금씩 늘려가며 악장끼리의 대비를 느낍니다. 그다음에 악기 음색을 구별하는 단계로 갑니다. 시대별 양식과 형식을 익히는 건 그 뒤입니다.
여기 깔린 태도가 핵심입니다. 이론서보다 청취량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많이 들으면 저절로 알게 되는 부분이 상당히 큽니다.
앨범으로 들을 것인가, 곡으로 들을 것인가
의견이 갈리는 지점이라 양쪽을 다 적어 둡니다.
앨범 쪽 논거는 곡의 순서와 배열도 작품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어서 그 순서로 하나삩 짜인 앨범인데, 거기서 곡 하나만 빼내면 그 곡이 놓인 자리가 사라집니다. 재생 목록은 남이 만든 작품을 내 마음대로 잘라 쓰는 도구라는 비판도 여기서 나옵니다.
곡 쪽 논거도 분명합니다. 앨범 단위 감상은 시간과 집중을 요구하고, 모든 앨범이 그럴 값어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곡이 평범한 앨범에 실려 있는 경우도 흔합니다. 앨범 옹호론을 쓰는 사람들조차 실제로는 재생 목록을 만들어 씁니다.
현실적인 절충은 역할을 나누는 것입니다. 배경으로 틀어 둘 때는 재생 목록을 쓰고, 새 아티스트를 제대로 알아보기로 마음먹었을 때만 앨범 하나를 통으로 듣습니다. 취향은 후자에서 만들어집니다. 일주일에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새 앨범을 찾는 것보다 같은 앨범을 다시 듣는 게 낫습니다
발견에만 집중하면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매주 새로운 것을 스무 장 훑는 것보다 마음에 걸린 한 장을 다섯 번 듣는 쪽이 결과가 좋습니다.
어떤 글쓴이는 새로운 걸 발견하면 질릴 때까지 강박적으로 반복해서 듣는다고 말합니다. 이게 취향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더 가깝습니다. 반복해서 들으면 처음에 안 들리던 것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베이스가 뭘 하고 있었는지, 뒤에 깔린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두 번째 절이 왜 첫 절과 다르게 느껴졌는지 같은 것들입니다.
몇 가지 보조 방법이 있습니다.
- 가사가 방해되면 가사 없이 듣습니다. 언어가 붙으면 귀가 그쪽으로만 갑니다.
- 한 악기만 따라가며 한 번 더 듣습니다. 베이스만, 드럼만 따라가면 완전히 다른 곡처럼 들립니다.
- 짧게 메모합니다. 두 줄이면 충분합니다. 나중에 자기 취향의 패턴이 보입니다.
- 재생 환경을 한 번은 제대로 만들어 둡니다. 좋은 헤드폰이나 스피커가 필수는 아니지만, 안 들리던 게 들리면 반복 청취의 재미가 달라집니다.
전문가도 이 과정이 매끄럽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매년 신보를 천 장 넘게 듣는 평론가조차 새 음악을 듣는 과정 전체가 어색하고 번거롭다고 씁니다. 잘 안 되는 게 정상입니다.
알고리즘 바깥에 들를 곳을 하나 정해 둡니다
추천에만 기대면 듣는 범위가 조용히 좁아집니다. 사람이 직접 고르는 곳을 한 군데 정해 두고 정기적으로 들르면 그 흐름이 끊깁니다. 실제로 쓸 만한 곳들입니다.
- Every Noise at Once — 수천 개로 쪼개놓은 장르를 점으로 흔뿌려 보여주는 지도. 이름도 모르던 장르를 클릭 한 번으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 Music-Map — 아티스트 하나를 넣으면 비슷한 순서대로 다른 이름들이 둔어납니다. 다음 한 발을 정하기에 좋습니다.
- Gnoosic — 좋아하는 아티스트 셋을 넣고 좋다·싫다로 답해가며 좀혀 나가는 방식.
- Radio Garden — 지구본을 돌려 그 도시의 실시간 라디오를 듣습니다. 사람이 골라 틀어주는 거라 다음에 뭐가 나올지 모릅니다.
- Radiooooo — 나라와 연대를 고르면 그 시절 그 지역 음악이 나옵니다. 오래된 것을 새것처럼 듣는 방법입니다.
- NTS Radio — 수백 명의 디제이가 직접 곡을 골라 틀어 줍니다. 상업 플랫폼에 아예 없는 음악이 많이 나옵니다.
- Bandcamp Daily — 판매 실적과 상관없이 쓰는 편집팀의 글. 장르별 입문 가이드가 특히 좋습니다.
- WhoSampled — 어떤 곡이 어떤 샘플을 썼는지 보여줍니다. 원곡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통로입니다.
- Discogs — 크레딧과 발매 이력을 파기에 가장 좋습니다.
여기에 오프라인 방법 하나를 더합니다. 레코드 가게를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통로를 지나며 재킷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검색으로는 절대 마주치지 않을 이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억지로 듣지 않아도 됩니다
마지막이 어쩌면 가장 중요합니다. 명반이라는데 하나도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건 귀가 덜 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안 맞는 것일 수 있습니다.
취향을 개선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기대를 내려놓고 그냥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입니다. 이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목록을 채우려고 듣기 시작하면 듣는 일이 노동이 됩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순서는 이렇습니다.
- 지금 좋아하는 곡 하나를 고릅니다.
- 그 곡의 크레딧이나 레이블, 샘플 원곡 중 하나를 따라 한 발 나갑니다.
- 거기서 마음에 걸린 앨범을 하나 통으로, 여러 번 듣습니다.
- 알고리즘 바깥의 한 곳을 정해 두고 일주일에 한 번 들릅니다.
- 안 맞으면 버립니다. 목록을 완주할 의무는 없습니다.
이걸 몇 달 반복하면 재생 목록이 저절로 달라져 있습니다. 1,001장을 순서대로 듣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빠릅니다.
NOIZ 소개
NOIZ는 한국에 기반을 둔 독립 음악 프로듀싱 팀입니다.
R&B와 재즈를 기반으로 EDM, 팝 등 다양한 현대 음악 장르를 결합해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을 만듭니다.